오봉국 박사의 회고록 ⑨ - 닭 경제능력 검정소

  • Published : 2016.09.01

Abstract

본고는 양계와 한평생을 함께 한 오봉국 교수(서울대 명예교수)가 그 동안의 인생여정을 정리하여 출간한 '축산의 비전을 심으며 살아온 나의 인생여정' 자서전 내용 중 '양계와 함께 걸어온 나의 회고' 내용을 발췌, 게재한 것이다. 오봉국 교수는 1925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1956년 서울대학교 축산과에서 농학석사과정을 거친 후 미국 미네소타대학과 호주 시드니 대학에서 석, 박사과정을 마친후 서울대학교에서 후학양성은 물론 양계산업 발전을 위해 많은 공을 세웠다. 1969년에는 (사)한국가금협회장(대한양계협회 전신)을 역임하고 현재까지 대한양계협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1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한 바 있으며, 현대가금학 등 16편의 주옥같은 저서를 남겼다.

Keywords

12. 닭 경제능력 검정소

닭 경제능력 검정사업의 필요성은 우리가 기르고 있는 여러 가지 계통의 산란계와 육용계의 경제능력을 검정하여 여기에서 얻어진 결과를 공포함으로써 종계를 개량하는 사람은 자기가 개량한 닭의 능력을 다른 계종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며 또한 자기가 개량한 닭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여 앞으로의 개량사업에 필요한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일반 양계가에 대하여는 우리나라 시장에서 팔고 있는 여러 가지 계통의 닭을 비교한 성적을 참고로 하여 농가가 필요로 하는 산란계와 육용계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와 자료를 제공하므로 우리나라 양계의 국제경쟁력을 기르고 농가소득증대에 도움을 주게 되어 우리나라 양계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이러한 취지와 목적에서 1959년부터 서울시축산협동조합에서는 당시 서울축협조합장으로 계시던 이창렬(李昌烈) 선생이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다산계경진대회(多産鷄競進大會)를 주관하였다. 다산계경진대회는 출품 1구 당 180일령 된 산란계 10수로하고 동일한 품종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서울축협에서 운영하는 평사용 양계장에 1칸에 2평 정도의 크기로 칸을 막고 10수를 집어넣어 180일간 사육하는데 계사 내에는 산란검정상자(Trapnest)를 설치하여 개체산란기록을 하도록 되어 있다. 당시 농림부에서는 이 사업에 대하여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있었으며 사업담당자는 한인규(韓仁圭) 수습행정관(기술고시에 합격하여 농림부 수습행정관으로 파견근무 중이었다)이 적극 지원하였으며, 나는 본 사업의 운영 심의관으로 위촉되어 있었다. 산란계경진사업은 닭 개량과 농가에 대하여 좋은 계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나 객관적 입장에서 평가하며 개체선발을 중심으로 한 개량과 선택이기 때문에 이 검정방법은 별로 큰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 전 세계적인 견해였다.

따라서 양계선진국에서는 닭 경제능력 검정법 “(Random Sample Laying Test)을 실시하였고, 이 검정 방법이 검정결과 신뢰성이 높다하여 1950년대부터 실시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65년도부터 민간 종계장에서 선진국으로부터 우수한 닭 품종을 도입하여 개량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 개량업체로는 김원복(金元福)선생이 경영하는 한국가금연구소(韓國家禽硏究所), 강금노(姜今魯) 선생의 신촌 부화장(新村孵化場), 이창렬(李昌烈) 선생의 이문 부화장(里門孵化場), 박도현(朴道鉉) 선생의 동신 종계장(東信種鷄場), 이정희(李正熙) 선생의 해동 부화장(海東孵化場) 등이 있었다.

1962년에 한국가금협회(韓國家禽協會)가 창립되고 가금연구회 회원들이 대거 협회에 동참하였다. 1963년경부터 외국종계와 실용산란계(CC) 병아리가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 일본 등지에서 무차별적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협회에서는 어떠한 검증도 없이 외국계 선전문만 보고 수입계를 보급할 수 없다는 견지에서 학계를 중심으로 닭 경제능력 검정사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농림부 당국과 농사시험장, 축산시험장 등 요로에 건의하여 가금협회에서 이 사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건의하였다. 정부와 연구기관에서는 검정사업은 국가기관에서 해야 한다고 반대의견이 제시되었으나 그렇다고 국가기관에서 검정사업을 수행할 수용능력도 없는 처지에서 뚜렷한 대안도 없이 2~3년이 경과되었다.

가금협회에서는 공인기관인 협회에서도 할 수 있다는 실증을 보여주면 정부에서도 승인을 해줄 것이라는 생각 하에 가금연구회 멤버의 한사람인 경기도 광주 종축장 장장으로 계신 이남표(李南杓)씨 주선으로 광주종축장계사를 빌려 협회에서 케이지를 설치하고 제1회 산란계능력검정사업을, 그리고 제2회 검정사업은 이문 부화장(里門孵化場)의 이창렬 선생이 자기 개인 양계장을 제공하여 사업을 실시한 바도 있다. 1964~1967년에 걸쳐 실시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닭 검정사업계획에 중심 역할을 하던 오봉국 교수는 1965년 9월에 호주 시드니대학교를 연수차 외국으로 출국하고 1966년 3월에 협회 제 3대 가금협회회장으로 고려대학교 교수로 계시던 이재근 교수님이 취임하면서 검정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경기도 광주종축장에서 수행된 검정사업실적을 높이 평가한 농림부에서는 당시 축산국장 김영한(金永漢) 선생이 사업의 중요성을 인정하시고 정부에서는 검정계사와 시설에 필요한 예산을 보조 할 테니 검정소 부지는 협회가 마련하라는 조건으로 사업이 승인되었다.

협회에서는 검정소 부지 마련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협회 부회장으로 계시던 김원복(金元福), 김영회(金榮會) 선생님과 박도현(朴道鉉), 이필룡(李弼龍) 선생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주었으며, 이 외에도 이계조(李啓晁), 유황(兪惶), 정태원(鄭台源), 이창렬(李昌烈), 강금노(姜今魯), 김현배(金賢培), 윤경중(尹京重) 업계 대표와 학계와 연구계에서는 이재근(李在根), 오세정(吳世正), 오봉국(吳鳳國), 최창해(崔昌海), 김동곤(金東坤), 이남표(李南杓), 이선형씨 등 여러분 외에 양계관련업계 유지일동이 적극 동참하여 서울시 도봉구 공릉동에 80만원의 구입비를 마련하여 부지 1,800평을 구입하였다. 그 당시 공릉동 배밭 땅 1평에 400원, 계란 1개 5원, 닭 1kg에 150원 정도 할 때 80만원이면 대단히 큰돈이었다.

이와 같이 큰 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가금협회가 업계(業界)와 학계(學界)가 하나가 되어 우리나라 양계산업 발전을 위해 일치단결하여 추진한 결과이며, 두 번째는 농림부 당시 축산국장으로 계셨던 김영한(金永漢) 선생님이 사업의 중요성을 인정한 점과 국가기관도 아닌 사단법인체인 가금협회를 신임하고 국가예산을 보조해준 용단이 있기에 가능하였으며, 이 기회를 빌려 김영한(金永漢) 선생님께 협회를 대신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세 번째는 그 당시 산란계 1,000수를 기르면 대군업자라고 할 정도로 양계농가가 영세한 처지였는데, 이 사업을 위해 십시일반으로 정성껏 협회사업에 회원 여러분이 참여하여 주었고, 부화사업을 하는 몇몇 유지(有志)는 몇 만원씩 찬조하여 주었다.

그 당시 이 사업에 적극 참여하신 몇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때 내가 무엇에 홀렸는지는 몰라도 협회사업이라면 나도 모르게 아까운 줄 모르고 협조했고, 사료 값 갚기 위해 준비했던 돈을 협회 회의에 나갔다가 바치고 왔다고 고백하였다. 이 정도로 협회 집행부와 회원이 서로 유무상통하여 업계발전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은 위대한 성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