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국 박사의 회고록 ③ - 가금연구회 발족과 장안동 양계강습회

  • 발행 : 2016.03.01

초록

본고는 양계와 한평생을 함께 한 오봉국 교수(서울대 명예교수)가 그 동안의 인생여정을 정리하여 출간한 '축산의 비전을 심으며 살아온 나의 인생여정' 자서전 내용 중 '양계와 함께 걸어온 나의 회고' 내용을 발췌, 게재한 것이다. 오봉국 교수는 1925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1956년 서울대학교 축산과에서 농학석사과정을 거친 후 미국 미네소타대학과 호주 시드니 대학에서 석, 박사과정을 마친후 서울대학교에서 후학양성은 물론 양계산업 발전을 위해 많은 공을 세웠다. 1969년에는 (사)한국가금협회장(대한양계협회 전신)을 역임하고 현재까지 대한양계협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1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한 바 있으며, 현대가금학 등 16편의 주옥같은 저서를 남겼다.

키워드

4. 가금연구회의 발족

1957년부터 닭 개량용으로 도입된 Minnesota 근교계통원종과 축산시험장에서 보유하고 있는 닭 품종을 이용하여 능력이 우수한 닭 일대잡종작출 연구 사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원조기관인 USOM의 축산담당 자문가인 Wilder씨의 도움으로 연구비를 확보하고, 서울대 농대 오봉국 교수 연구실(가금학연구실)과 축산시험장과의 공동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이 시험사업을 원활이 수행하기 위하여 매월 첫째 토요일에 공동연구진이 세미나를 열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대학에서 가금학을 전공하는 교수와 시험장의 연구관이 합세하여 가금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연구회 창립 목적을 새로운 양계지식과 기술의 교류 및 종계개량에 대한 과제를 가지고 세미나를 하는 것이었는데, 회원은 도종축장 기사를 포함하여 12명이었다. 대학교수로는 오봉국(서울대), 이승규(서울대), 이재근(고려대), 오선균(충북대), 나광연(충남대) 교수와 축산시험장 연구관으로는 최창해, 김동건, 오세정, 지설하, 박영수, 박상문, 도종축장 대표로는 이선형(경기도), 한연동(충남도) 선생이 연구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연구회를 이어받아 1972년에 세계가금학회 한국지부가 창립될 때까지 약 15년간 지속되었는데 주로 축산시험장에서 모임을 가졌으나 연 2~3회는 대학과 도종축장 등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개최되었고 양계장의 현장답사 등을 가지고 양계현황을 살피는 한편 문제점을 도출하여 진지한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 모임이 후일 가금협회(현 양계협회) 탄생에 산파 역할을 하게 되었고 세계가금학회 한국지부를 설립하게 되었다. 

닭 일대잡종육종사업을 위하여 축시(畜試)와의 공동연구를 시작할 때의 숨은 이야기 한 토막이다. Minnesota 근교계통원종계는 농대에 있고 축시보유품종과 교배를 시켜야 하겠는데, 어느 한쪽의 닭을 옮겨야 할 형편에 있었다. 농대는 시설 규모도 작고 예산이 부족하여 축산시 험장 가금과 계사로 닭을 옮겨야 할 형편인데, 그 당시 뉴캣슬병이 만연하여 닭을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원종을 어떤 불의의 사고가 생겨 원종이 전멸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가축대장에 기재된 원종축의 계란생산액의 국고수납 등 문젯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연구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용단이 필요하였다. 당시 본 대학 축산과장으로 계시던 윤상원 교수님의 허락을 얻어 모든 책임을 내가 지겠다는 각서를 쓰고 학장 몰래 빌려준 적이 있었다. 다행히 닭은 무사히 회수할 수 있었다. 본 연구 사업을 통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교잡육종에 의한 일대잡종생산기술이 확립되고, 농가에 보급하는 실용계는 순종이 아닌 F1으로 사육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다. 

5. 장안동 양계강습회

1959년 2월초로 기억된다. 서울 장안동에서 한양부화장을 경영하고 있던 김현배(金賢培) 선생님이 나의 연구실로 찾아와 서울 장안동 근교에서 양계농가 15명이 양계친목회를 조직하고 새로운 양계기술과 지식을 얻고자 하니 월 1회씩 나와서 강의를 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김 선생님의 진지한 태도에 감동되어 즉석에서 응낙하였다. 

나는 그 당시 서울대학교 농대에서 양계담당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때였으며, 새로운 양계지식과 기술을 보급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새로운 양계」라는 책을 써서 기술보급에 힘쓰고 있을 때였다. 또한 대학교수의 사명의 하나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사회봉사라는 차원에서 강습회를 개최하여 봉사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3월에 드디어 강습회 날이 왔다. 당시만 해도 성동구 장안동까지 가자면 수원에서 3시간 앞두고 출발하여 기차를 타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만 했다. 도착한 곳이 장안초등학교였다. 3월초의 방과 후 교실에는 희미한 전등불이 켜 있고, 저녁의 쌀쌀한 밤 기온에 불기도 없는 마룻바닥에 초등학교 학생들이 앉는 조그마한 책상과 걸상 위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당시 60세의 전직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이기능 선생님을 비롯하여 모두 40세 전후의 어른들이 학생처럼 교실에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옛날 개화기 때의보통학교를 연상시켰다. 강의의 약속시간은 2시간이었으나 보통 3시간은 계속되었으며, 강의를 하는 사람들이나 듣는 사람은 너무나 진지했고 선생과 학생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강의도 하였고, 어떠한 양계문제를 놓고 토론도 하였다. 

강의내용은 주로 새로운 양계이론과 기술이었다. 순종만이 다산계라는 생각에서 탈피하여 교잡종인 일대잡종(F1)이 더 건강하고 다산한다는 사실, 가금영양에 있어서 TDN보다는 생산에너지(PE)를 그리고 단백질보다는 단백질을 구성하는 필수 아미노산이 더 중요하며, 닭에 있어서도 각종 비타민과 광물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첫째는 채란계의 종계 선택방법이 개선되어 「햄프혼」「록크혼」등 F1 실용계를 사육하게 되었으며, 

둘째는 자가 배합사료를 미국사양기준인 NRC사양표준에 따라 배합하게 됨으로써 사료효율을 높이고 특히 겨울과 봄철 비타민 A 부족으로 생기는 영양성호흡기병을 예방할 수가 있었다. 

셋째는 부리자르기와 볏자르기 등 새로운 사양관리 기술을 보급하게 되어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왔다. 장안동 양계강습회는 회를 거듭할수록 수강자수가 늘어갔고, 그해 여름에는 초등학교 교실이 꽉 찰 정도로 크게 늘어나 결국 이것이 계기가 되어 양계협회 창립의 모체가 되었다. 

물론 나는 이 당시 강사료를 받고자 강습회에 출강한 것도 아니며 강사료 대신 거마비라 하여 교통비 정도 받은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그해 강습회가 끝나고 유지일동이 나를 초대해 주어 을지로 4가의 “우래옥”불고기 집에서 푸짐한 대접을 받고, 그 당시 최고급 신사복 한 벌 선물로 받은 일이 있어 그 후부터는 강습회장에 멋진 신사복을 입고 강단에 서곤 하였다. 

장안동 양계강습회는 양계인의 대화의 광장으로 변하여 고대 희랍의 철학자들이 인생을 논하는 「아크로폴리스」광장과 같이 양계에 관한 지식과 기술교류의 토론의 광장이 되었다. 여기에는 순수 양계업자 뿐만 아니라 학계와 양계관련 업체의 동물약품회사, 사료회사 임직원도 많이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1962년 8월에 장안동 양계강습회와 가금연구회 회원이 중심이 되고, 부화, 종계업을 하는 중견인사와 각 지역 양계인들이 모여 한국가금협회 창립준비에 착수하게 되었다. 1961년도부터는 강습회 장소가 협소하고 장안동 지역 교통이 불편하여 시내로 장소를 옮겨 강습회를 개최하였는데 초기에는 건국대학교 낙원동 교사에서 후기에는 신촌에 있는 축협회의실에서 월례 양계강습회가 개최되었다. 강습회 종료 후에는 매월 협회 이사회를 개최하여 업계의 현안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여 나가는 전통을 만들어 갔다. 

매월 모이는 강습회야말로 양계기술정보의 교류 외에도 양계가족으로서의 공동체 의식과 회원 상호간의 응집력을 갖게 하여 한국가금협회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