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정보
연구 과제 주관 기관 : 경북대학교, 한국연구재단
서한(西漢) 시대의 역학자 경방(京房)은 다양한 해석방법을 개발함으로써 상수역의 이론적 발전과정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다산역의 해석방법론은 상수역에 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역학사적 기원을 밝히기 위해서는 경방역과의 관계가 명확히 해명될 필요가 있다. 필자는 다산역과 경방역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하여 정약용이 효변설과 관련하여 경방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렸는지의 문제를 고찰하였다. 효변설이란 효의 변화에 의하여 변괘(變卦, 즉 지괘(之卦))가 형성된다는 이론이다. 정약용은 "주역사전"에서 경방이 역사(易詞)를 풀이함에 있어 효변설을 적용하였다는 추정을 내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건초구(乾初九), 관상구(觀上九), 박상구(剝上九) 등의 역주(易注)에서 찾았다. 정약용이 제시한 증거를 통해서 본다면, 건초구(乾初九)와 박상구(剝上九)는 효변을 취한 명백한 증거로 보이는 반면에 관상구(觀上九)는 증거로 채택하기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그러나 설령 두 곳에서 경방이 효변을 적용한 것이 명백하다고 하더라도 정약용의 효변설과 경방의 효변설이 같은 것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오히려 양자의 효변설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서로 계통을 달리하는 이론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 다음으로, 정약용은 건초구(乾初九)의 역주(易注)에서 경방과 더불어 효변을 이해하고 있는 인물로 경방보다 대략 백여년 이전(以前)에 활동했던 가의(賈誼)를 언급하였다. 필자는 가의가 세상을 떠난 기원전 168년은 마왕퇴 3호 한묘(漢墓)의 묘주(墓主)의 묘장(墓葬) 연대와 같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효변설의 근거로 제시되어 온 "춘추좌씨전"의 '모괘지모괘(某卦之某卦)'의 형식은 마왕퇴(馬王堆) 백서본 "주역"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기원전 168년 이전(以前)에 "모괘지모괘(某卦之某卦)"의 형식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음이 확실해진다. 만약 가의가 마왕퇴 백서본 "주역"에 나타난 효변설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고 있었고, 경방도 역시 효변설을 이해하고 있었다면, 효변설은 역학사적으로 가의 이후로 경방에 이르기까지 백여년 동안 전승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추론에 대해 설득력있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이것은 역학사적으로 중요한 발견이 될 뿐 아니라, 다산역의 이론을 확증해주는 증거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This essay aims at clarifying Dasan Jeong Yagyong's view on Jingfang's yaobian theory. As is well known, Jingfang was a scholar of the Earlier Han period who exerted a profound influence on the theoretical development of Xiangshu School by creating the various techniques for interpreting the Zhouyi. Jingfang is also important in relation with Dasan's commentary of the Zhouyi, because some part of Dasan's interpreting techniques are thought to have their origin in Jinfang. For example, Dasan used the bigua theory of which the origin could be traced back into Jingfang. However, in this article, I did not deal with the bigua theory because I am going to write another article about it. In stead, my focus will be put on analyzing how Dasan evaluated Jingfang's yaobian theory. The main issues of my argument can be summarized as following. Firstly, in terms of yaobian, Jeong Yagyong called attention to Jingfang's annotation on the Zhouyi in which Jingfang utilized the yaobian method in three occasions, i.e., the first nine of the Qian(乾初九), the sixth nine of the Guan(觀上九), and the sixth nine of the Bo(剝上九). It seems that Jeong Yagyong set forth enough evidence about Jingfang's use of yaobian at least in relation to two cases of the first nine of the Qian and the sixth nine of the Bo, while the other evidence of the sixth nine of the Guan was not so persuasive. However, even if it is evident that Jingfang made use of the yaobain in two cases, there is no reason to equate it with that of Dasan. If one takes a close look, it becomes clear that Jingfang's way of yaobain is very different from Dasan's. Secondly, Jeong Yagyong mentioned Jiayi(賈誼) who lived about one hundred years before Jingfang, as the person who utilized the yaobian in his book of Xinshu(新書). If it is certain that Jiayi was aware of the yaobian, we can assume that the yaobian technique had been handed down from Jiayi to Jingfang. The manuscript excavated from the Mawangdui tomb also increases the possibility that Jiayi could have had the knowledge on the yaobian. In the chapter of Muhe(繆和) of the Mawangdui Zhouyi, there appears the phrase, i.e., "the first six of the qian, qian goes to mingyi," which shows exactly the same form of the yaobian in the Mr Zuo's Spring and Autumn Annals(春秋左氏傳). The burial period of Mawangdui tomb is estimated at the same year of B.C.168 in which Jiayi died. Therefore, judging from that fact, it becomes evident that the yaobain method was widely diffused around B.C.168. Subsequently, it is possible to infer that the yaobian method had been handed down from the period of Jiayi to Jingfang. If we could present the persuasive evidence to support that inference, it would also have the effect of consolidating Dasan's argument about the yaobian.
연구 과제 주관 기관 : 경북대학교, 한국연구재단